청렴과 담쌓고 갑질 중시하는 新 이씨왕조 충신?
- 북민위
- 2025-07-10 07: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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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졌다시피 14~20세기 존속한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절대왕정(絕對王政) 국가다. 원칙적으로 나라 안의 모든 것은 임금의 소유물이었으며 어명(御命)을 어긴다는 건 곧 죽음을 뜻했다. 그러나 역대 군주의 대다수는 청렴함과 겸손함을 목숨처럼 아꼈다.
수랏상은 조선팔도에서 진상된 재료로 대령숙수(待令熟手)가 만든 열두 첩 반상(飯床)이 기본이었다. 허나 이는 각지의 풍‧흉년 여부를 두루 살피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이를 혼자 다 먹는 대신 몇 개에만 젓가락 댔다. 나머지는 온전히 남겨 고된 궁중(宮中) 일을 하느라 허기진 말단 궁인(宮人)들이 배를 채우도록 했다.
대다수 임금들은 또 스스로를 과인(寡人) 즉 덕이 없는 자라 일컬으며 교만을 경계했다. 심지어 한 신하가 임금을 “너(!!!)”라고 불렀음에도 유야무야 넘어간 사례도 있었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의하면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정인지(鄭麟趾)는 주량이 매우 약했다. 어느 날 세조와 한 잔 꺾은 정인지는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그런 나머지 임금에게 삿대질하며 “너…! 너…! 딸꾹. 나… 나라면 너처럼 하지는 않겠다. 딸꾹” 술주정 부리는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군주를 주상(主上) 혹은 전하(殿下)가 아닌 ‘나으리’라 부르는 것도 대역무도(大逆無道)한 불경죄(不敬罪)였다. 구족(九族)이 멸족돼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 감히 임금에게 ‘야자’를 까버린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에 종친(宗親)들은 물론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까지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주상을 나리라 칭한 사육신(死六臣)의 성삼문(成三問)과 다를 바 없는 역신(逆臣)”이라며 탄핵했다.
허나 세조는 “정인지는 그저 노쇠한 일개 유생(儒生)일 뿐이다. 취중(醉中)에 한 말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두둔했다. 정인지는 여든이 넘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다가 편히 갔다.
상행하효(上行下效)라고 했던가. 이러한 영향으로 이조시대의 역대 재상 대다수도 청렴함과 겸손함을 미덕(美德)으로 삼았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인물이 각각 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을 지낸 맹사성(孟思誠)과 류관(柳寬)이다. 세간은 황희(黃喜)까지 포함한 세 사람을 일컬어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 불렀다.
고불(古佛) 맹사성은 19세 나이에 장원급제했다. 어깨가 한껏 올라간 그는 어느 날 한 스님과 만났다. 스님이 차 한 잔을 대접하는데 잔이 넘쳐흘렀다. 맹사성이 이를 일깨워주자 스님은 “차가 넘치는 건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격 망치는 건 모르나” 호통 쳤다. 부끄러워진 맹사성이 선방(禪房)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문틀에 머리가 부딪혔다. 스님은 “몸을 낮추면 이마가 다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맹사성은 이후 겸허(謙虛)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맹사성은 해묵은 녹미(祿米‧정부미 격)로 끼니를 해결했고 출타할 때는 흑우(黑牛) 한 마리를 타고 다녔다. 때문에 의관정제(衣冠整齊)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좌의정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루는 맹사성이 여느 때처럼 검은 소에 올라 퉁소 불며 고향 온양(溫陽)으로 내려갔다. 좌의정 대감이 행차한다는 첩보에 일대 고을 수령(守令)들은 이 기회에 잘 보여 한양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들은 길을 깨끗이 닦고 기립한 채 맹사성을 맞이하려 했다. 그런데 으리으리한 행렬은 안 보이고 웬 시골영감 하나가 소 타고 휑하니 지나갔다.
길이 더러워져 열 받은 수령들은 아전(衙前)들을 시켜 잡아오게 했다. 맹사성은 “온양 사는 맹꼬부리가 제 소 타고 제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 붙드는고?” 허허 웃고서 다시 길을 떠났다. 눈앞이 아득해진 수령들은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위해 급히 따라 달려갔다. 그 중 하나가 허둥대던 나머지 인수(印綬)을 못에 빠뜨렸는데 이후 이 연못은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리게 됐다.
맹사성은 이처럼 휴가를 얻으면 고향 온양으로 종종 놀러갔다. 취미는 피라미 낚시였다. 맹사성이 시냇물에 대나무 낚싯대 드리우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며 물이 불어났다. 건너편의 한 젊은 선비는 맹사성이 일반백성인 줄 알고 “선비가 감히 옷을 걷고 체통 없이 건널 수 없다. 나를 업어라” 갑질했다. 맹사성은 군말 없이 선비를 옮겨다줬다.
그런데 뭐가 그리 심술이 났는지 선비는 역정 내며 맹사성의 삿갓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지체 높은 양반들만 쓸 수 있는 옥관자(玉貫子)가 드러났다. 놀라 자빠진 선비는 “댁… 댁은 대체 뉘시오?” 물었다. 맹사성은 빙긋 웃으며 “온양 사는 맹꼬부리라네~” 답했다.
어느 날 맹사성이 길을 가다 주막에서 쉬는데 거기에서도 폭우가 쏟아졌다. 발이 묶이자 어김없이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말을 걸어왔다. 젊은이는 적적했는지 맹사성에게 ‘공당(公堂)놀이’를 제안했다. 맹사성이 말끝마다 ‘~공’을 붙여 질문하면 젊은이는 ‘~당’을 붙여 대답하자는 ‘야자타임’ 요구였다. 맹사성은 이번에도 선선히 허락했다.
그리하여 맹사성이 운을 뗐다. “그대는 어디를 가는공?” “한양에 간당” “한양엔 왜 가는공?” “과거시험 보고 맹정승 밑에서 일하러 간당” “조정에 아는 사람은 있는공?” “없당” “그럼 내가 벼슬자리 하나 주면 어떤공?” “(포복절도하며) 헛소리 들을 시간 없당”
마침내 하늘이 개자 맹사성과 젊은이는 각자의 길을 떠났다. 과거에 합격한 젊은이는 맹정승을 예방(禮訪)했다. 엎드려 절한 젊은이가 고개 들자 맹정승은 다름 아닌 자신과 공당놀이를 했던 그 노인이었다. 젊은이가 기절초풍하자 맹사성은 미소 지으며 공당놀이를 걸었다. “그대, 나를 알아보겠는공?” “아… 알아보겠당” “지금 기분이 어떤공?” “주… 죽고 싶당” 허나 맹사성은 젊은이를 나무라지 않고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하게끔 도왔다.
하정(夏亭) 류관 또한 나는 새도 격추시키는 우의정이었음에도 근검절약‧갑질경계를 좌우명 삼았다. 그는 베옷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식탁에는 늘 밥과 국‧소찬(素饌)만 올랐다. 혹 손님이 오더라도 탁주 한 사발에 소금에 절인 콩 등만 대접했다. 나라에서 받은 녹봉(祿俸) 대다수를 고을에 다리를 놓거나 동네아이들의 먹과 붓 값으로 지출한 탓이었다.
류관은 동대문 밖 낙산(駱山) 아래의 담장 하나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비가 오면 빗물이 줄줄 새 안방은 흥건해지곤 했다. 그러다가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쏟아지자 류관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안방에서 우산을 받쳐 들어 비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도리어 “우산이 없는 백성들은 어떡하지” 부인에게 걱정했다.
류관의 집은 우산정(雨傘亭) 또는 우산각(雨傘閣)으로 불리게 됐다. 고을에도 우산각골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세기 들어 서울 동대문구 숭의여중 앞에는 우산각공원이 조성됐다. 하정로(路)의 이름은 류관의 호(號)인 하정에서 따왔다. 서울시는 2009년부터 본청 및 25개 구청에서 매년 청렴한 직원을 발굴해 포상하는 ‘하정 청백리상 시상식’을 진행했다.
‘절대왕정’ 논란의 ‘신(新) 이씨(李氏)왕조’에서 A부처 초대 장관 후보자로 B씨가 지명됐다. B씨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전문가’로서의 면모가 합격점을 받았다고 한다. 헌데 B씨가 이씨조선에서도 보지 못한 ‘갑질‧남용’ 의혹에 휩싸였다.
B는 자신의 보좌진에게 자택 쓰레기를 버리게 하거나 심지어 고장 난 변기 수리를 시켰다고 한다. 상당수 증인도 있다고 한다. B씨는 SBS 취재진에게 “가사도우미가 있어 쓰레기 정리 등 집안일을 보좌진에게 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변기 수리와 관련해선 집이 물바다가 됐다”며 과거 한 보좌진에게 말한 적은 있으나 수리를 부탁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헌데 공교롭게도 B씨 보좌진은 5년 새 46차례나 교체됐다고 한다.
B씨는 관용차 유류비에 대학원 등록금까지 정치자금을 남용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2020~2024년 정치자금으로 유류비 2천만 원을 지출하고 2020년 S대 환경대학원 도시환경미래전략 과정 등록금으로 정치자금 4백만 원을 썼다는 것이다. B씨는 S그룹 임원들로부터 ‘쪼개기 후원’을 받고서 여태껏 반환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있다. B씨는 해당 의혹들도 부인했다고 한다.
B씨의 해명이 사실일 수도 있다. 반대로 의혹이 진실이라면 “윗사람이 하는 행실을 아랫사람이 본받는다”는 말처럼 과연 누구를 거울삼아 갑질‧남용을 저지르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신(新) 이씨(李氏)왕조’ 수장은 절대왕정이라는 오명(汚名)을 감당할 수 있다면 B씨 임명을 강행해도 된다. 준엄한 평가는 국민과 후세가 내릴 것이다.
오주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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