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은 역사적 의미가 다르다!
  • 지일
  • 2012-01-17 06: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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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와 5.18은 역사적 의미가 다르다!! 
 

필자는 2002년 광주 감옥에 끌려가면서부터 5.18역사를 쓰려 했고, 감옥에서 나오면서부터 5.18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모두는 A-4지 18만쪽이고 이를 복사하고 파일로 묶으려면 2억원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서 필자는 12.12역사도 국가의 역사다 싶어 있는 그대로를 소화하고 해석하여 12.12역사도 썼다. 문서의 양으로 보면 12.12역사자료는 5.18역사자료에 비하면 10분의 1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자료를 놓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은 5.18역사를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정신적인 집중력이 참으로 컸고, 마음은 감옥의 담장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 잘못 쓰면 필자가 심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역사를 쓰면서 필자는 전두환도 되어 보고 이학봉도 되어 보고, 정승화도, 윤성민도, 장태완도, 정병주도 되어 보았다. 등장인물 모두에 필자 자신을 세워놓고 역사를 썼다.

하지만 5.18 역사쓰기는 아주 간단했다. 전두환을 감옥에 잡아넣은 검찰기록을 그대로 수용해서 사실 전개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2.12역사와 같은 고도의 판단력과 집중력이 동원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필자가 기울인 집중력과 노력의 양에 비해 12.12는 5.18에 비해 역사적 무게감이 적었다. 왜? 12.12는 전두환이 정당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개인적인 역사인 반면 5.18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좌익역사가 되느냐, 우익역사가 되느냐에 대한 국가 정통성에 대한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절대적으로 미약한 자연인으로서의 필자의 역량’을 오직 5.18역사에 집중하여 계몽을 했고, 그 다음으로 필자에게 전혀 생소했던 4.3역사를 다시 썼다. 필자가 쓴 4.3역사는 노무현 정부가 국가의 이름을 걸고 쓴 ‘정부보고서’를 그야말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기를 세워 썼다. 이로써 필자는 의협심 있는 수많은 애국자들이 나서서 싸울 수 있도록 충분히 압도적인 사실자료와 논리를 내세워 썼다.

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쓰는 것도 비상한 노력과 용기를 요하는 것이지만, 쓴 것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쓴 것은 필자 혼자 썼다. 하지만 전파는 필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필자를 아끼고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극히 소수의 애국회원님들께서 사비를 털고 설득력을 펴서 애국운동에 종사해 오셨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시간이 갔다. 이제는 솔직히 지친다. 필자는 다행히 동지들을 만나 500만야전군을 창설했다. 5.18에 대한 광고를 냈다. “5.18은 반란이다”라는 매우 직설적인 제목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배포하고 있다. 여기에 동원된 애국국민들의 노력을 속속들이 음미하면 눈물부터 난다. 90세 전후의 어른들, 이분들의 노력을 전해들을 때면 더욱 그렇다.

이런 애타는 노력을 들을 때마다 팔자는 전두환을 마음에서부터 원망하게 되었다. 왜? 전두환이 그 엄청난 금전적 부정 등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5.18역사는 절대로 뒤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박대통령으로부터 보고 배운 게 있어 박대통령에는 비할 수 없지만 참모들을 비교적 잘 썼다. 그래서 경제 및 안보에서는 애국국민들로부터 성공적인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정권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해 너무 많은 것들을 양보했고, 그 양보한 것들이 오늘 날 빨갱이들이 번식할 수 있는 무대와 자양분을 제공했다.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 박정희는 끝까지 기를 세웠지만 전두환은 그렇지 못해 오늘날 빨갱이들이 번창할 수 있는 온갖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연좌제 폐지가 그러했다.

전두환이 스스로 돈을 밝히지 않았고, 노태우를 후계자로 내세워 야무지게도 자기가 배후 조종하는 식의 원로정치를 꿈꾸지 않았고, 친인척들, 가신들이 꿀 개미처럼 달려들어 파먹지만 않았고, 째비도 안 되는 남동생 전경환을 감히 이 나라의 정신적 운동인 새마을운동의 총재로 앉히는 등의 작폐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는 국민 대부분으로부터 돌팔매를 맞을 필요가 없었으며, 돌팔매를 맞을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5.18을 독재자 전두환이 저질렀다”는 근거 없는 누명은 뒤집어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난 10여년 동안 필자가 감옥에 가고 3년 동안에 걸쳐 5.18단체들로부터 5.18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여기 극소수의 애국자들이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해 사비를 들여 책을 사서 여러 곳에 배부하면서도 싸늘한 눈총을 받는 이 허황된 비극은 겪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역사를 빨갱이들에 찬탈당하는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사리가 이러한데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5공 세력들은 12.12만 중요하고 5.18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로 나아간다. 필자는 5공 세력에 대해 5.18광주 세력 못지않게 못 말리도록 소통이 안 되는 이기집단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공공성이 없어 보이고 애국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제까지 필자가 3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5공세력은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극히 2-3명 정도가 정세파악 차원에서 불과 몇 차례에 걸쳐 방청했고, 필자의 요청에 의해 정호용 전장관이 2심 재판에 한번 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공수대대 김일옥 중령이 증인으로 나왔지만 그는 5공세력이 아니었다.

반면 12.12와 5.18 역사를 사회적으로, 특히 좌익사회로부터 욕을 먹는 지만원이 썼다는 사실에 불만족을 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아마도 필자가 쓴 책을 다른 사람이 썼다면 그들은 그 사람의 종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두환은 12.12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5.18의 주인공은 군이다. 당시의 군은 정신 상태로 보아 보안사보다 몇 배 위에 있었다. 12.12는 수사선상에 있었던 작은 역사였고, 그래서 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주도할 수 있었지만, 5.18은 국가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고, 보안사로서는 실력과 위계질서 상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작전분야였기에 전두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였다.


2012.1.1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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