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애통해한 광주폭동
  • 광복군
  • 2011-10-12 20: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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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애통해한 광주폭동

김정일은 광주폭동이 실패하자 슬퍼하며 미완의 혁명, 영웅적 인민봉기라 했다.

부마사태의 성공에 고무된 김정일! 광주폭동으로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트린 후 적화통일을 달성한다. 그것이 바로 김정일이 원하던 바였다. 광주폭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서 국지도발전을 일으킨다면, 대한민국은 폭도들 진압에 경찰과 군 병력을 투입할 것이고, 대한민국이 폭도들로 인해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적화통일을 획책한다. 이것이 바로 김정일이 원하던 바였다.

김정일은 5.18 광주폭동이 실패하자 크게 비통해하며 미완의 혁명이라며 절규헀다 한다. 나중에 정신을 어느정도 차리고 난 뒤에는 영웅적 인민봉기라며 추모하였다. 김정일은 5.18의 실패를 크게 슬퍼했다 한다. 김정일에게 5.18 광주폭동은 어떤 의미였던가.
5.18 광주폭동은 전쟁이었다. 한국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미화, 찬양하는 5.18 광주폭동! 그러나 광주폭동은 김정일과 전두환의 전쟁이었다.

생모의 사후 계모에게 구박받던 김정일에게 후계자 자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해줄수 없는 자리였다. 김일성은 진작부터 후계자를 김영주, 김평일 등 다양하게 선정해놓고 그 중에서 고르려고 했고, 김정일은 이때문에 상당히 초조해했다 한다.
여기에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김대중의 더러운 욕망 역시 김정일의 야심을 부추기기 충분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 손잡을 대상이 필요했던 김정일에게 대통령병에 걸린 김대중의 원한을 주목했다.

아바이 수령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랐던 김정일!

김정일은 1974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인민군 병사 2명이 미군을 도끼로 찍어버린 사건을 배후 지휘했다. 도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인민군들은 사정없이 도끼로 내려찍어버렸다. 그러나 미제 괴뢰 2명을 타살하는 용맹을 자랑하려 했던 김정일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판문점 도끼사건은 국제사회에 만행으로 소개되었고, 데탕트라는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던 김일성은 김정일을 불러다가 호되게 질책했다. 어버이 수령에게 큰 선물을 주려고 했던 김정일은 망신만 털고, 어버이 수령 한테 인정받으려다가 심한 욕만 먹었다. 김정일의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갔을지는 안봐도 훤하다.

74년의 판문점 도끼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김정일은 또다른 계획을 짠다. 인민군 공작원들을 남한에 내려보내서 폭동을 일으키고, 대한민국 정부가 폭도들을 진압하는데 전심전력을 쏟을 때 남침을 계획한 것이다. 79년 10월 박정희의 김영삼 구속에 반발하여 일어난 부마폭동에 맞춰서 인민군을 남하시켰지만 성과가 별로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여기서 포기할 위인이었던가? 1980년 3월 다시 북한 인민군을 내려보낸다. 그러나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대대 이창룡 대위가 이끌고 남하하던 인민군은 파주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북한산 근처에서 검거된다. 그로부터 12년 전인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파주와 원당, 일산을 거쳐 서울 세검동, 고양군 벽제면, 파주군 법원리 등에서 검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결국 이창룡 대위 이하 인민군들은 서울 불광동 근처에서 검거된다.

두 번의 인민무력부 특수정예요원 남하가 성과없이 끝나자 김정일은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겠는가? 이성을 상실한 김정일이 보기에 두 번의 인민군 남하는 실패했지만 일단 남한 사회에 침투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남한사회를 전복시키거나 크게 들쑤실수 있다는 한가닥 망상이 김정일의 마음속에 움트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새벽, 친북좌파 대학생들 10~15만명의 시위(1980. 5. 1 - 5. 16) 이후 연금당한 김대중이 "이런 자들과는 절대 타협해서 안된다"고 선언했고, 5월 18일 새벽 6시에는 광주시내에서 폭도들이 29개의 병기고를 일제히 탈취한다.
김대중의 선동 발언과 폭도들의 병기고 탈취는 김정일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6년을 절치부심하고 전전긍긍하다 못해 이성을 상실한 김정일의 눈에 뵈는게 과연 있었을까?

김정일은 즉시 인민군 특수부대 600~800명을 잠수함에 태워서 남하시켰다. 남하한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은 전라남도 영광과 목포 해안가를 통해 광주시내에 도착한다.
침투한 인민군들은 남한의 친북좌파들로부터 입수한 남한 군복,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들을 향해 총질을 했다. 18일 새벽부터 계엄군이 여고생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대검으로 임산부들 배를 갈랐다, 계엄군이 사람고기를 뜯어먹는다, 계엄군이 사람의 가죽을 벗겼다 등등.... 터무늬없는 유언비어에 자극받아 흥분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것이다.

폭도들이 말한 계엄군이 바로 이놈들이었구나! 광주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몸서리쳤고,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은 다시 친북좌파들이 보내준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계엄군과 공수부대가 만행을 저질렀다며 유언비어들을 날조한다. 5월 21일에 가서 광주는 결국 인민군 특수부대원들과 시민군 폭도들에 의해 해방구를 구성한다.

그러나 한줌도 안되는 폭도들과 인민군은 계엄군과 공수여단 3개 여단에 밀렸고, 김정일과 김대중의 희망은 순식간에 실패했다. 실패가 예상되자 이들은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전남도청에 설치한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다. 과연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일어섰다는 인간들이 어떻게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자신들은 물론 애꿎은 시민들까지 함께 자폭할 생각을 했을까?


광주폭동 뒤에는 전두환의 모가지를 따겠다 라며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 인민군 고급장교, 대좌 4명, 상좌 3명과 인민군 소장 1명을 파견해 테러사건을 조종했지만 이것마저 실패한다. 애국가 소리가 흘러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한 줄 알고 버튼을 눌렀지만, 애국가는 전두환이 아니라 전두환 도착 전 서석준 부총리 외 80여명의 장차관들이 사전예행연습을 하던 것이었다.

광주폭동의 실패를 김정일은 애통해하였다. 미완의 혁명, 영웅적 인민봉기..... 김정일은 그런 인간이었다. 애국가의 가사처럼 하느님이 보우하사였는가, 김정일의 계속된 음모가 실패한 것이 놀라울 만큼 신기한 일이다. 광주폭동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반역자들에 의해 미화, 왜곡되었다. 이 왜곡된 폭동, 반사회적 무장반란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김정일의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비록 일선에서 한발 물러섰을 망정 김정일의 적화통일 욕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함이 없다. 탐욕스러운  변태 범죄자 김정일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의 안녕과 평화와 번영이란 없다. 하루라도 빨리 반역자 김정일을 잡아다가 국제전범재판소에 회부하여 수많은 동포, 형제들을 살육한 죄에 대한 책임을 물려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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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게 5.18 광주폭동은 어떤 의미인가?

광주폭동 실패 후 북한이 광주폭동을 추모하여 만든 잠수함 5.18 청년호 1호와 2호
: 김정일과 북한은 왜 5.18의 실패를 슬퍼하며 추모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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